연보해설
조선시대 청렴결백의 황희 정승의 예학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 기호문화의 성지, 옥동서원
1415년에 익성공 황희선생의 둘째 아들 소윤공황보신이 고려조 상산김씨의 세거지인에 입향하며 방촌영정을 봉안하고 정성 지레를 올리든 곳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1510년 축옹 황효헌이 동고 이준경을 가르키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1518년 중종조에 확대된 사가독서법에 따라 호당에 선임된 축옹 황효헌과 유촌 황여헌 형제가 횡당을 설치 익성공 황희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유림과 더불어 사가 독서하든 시기부터를 옥동서원의 시효시라 하였다.
1555년 임유정(사명당)이 와서 유촌 황여헌에게 맹자까지 수료했음이, (장수황씨세첨, 가사)에 기록되어 동고 이준경에 이어서 후학 양성이 입증된다.
1558년 황징의 신덕정사팔영중 백화서원이라는 시문에 의해 서원으로 전해지며, 1580년 황돈 등이 백옥동영당을 새로 확대 중건 하나 1592년 임진.계사에 천하촌과 더불어 완전 소실된다.임란이전에 천하촌의 기록된 건물만도 고려조 상산김씨 황보신의 세거지와, 사가독서횡당(황효헌), 신덕정사, 백화서원(황징), 신덕별서(황여헌), 백옥영당(황돈), 애일헌(황세헌), 충우정(황완), 산택정사(김홍민), 문집 등 (반간문집, 상산지, 김상정 중산행, 제문)이다 모두가 후학을 양성하고 본인의 심신 수련의 장소로 천하촌을 이용하였다.
임란이 끝나고 천하촌이 폐허가 된 공간에서 1595년 영묘 영정만 봉안한 가운데 수학의 장소는 사찰로 옮겨져서 계속되었는데 반야사 두역사, 보문사, 진불암, 직지사, 등이다.
임진왜란이후 백화서당(유림), 중모초당(황뉴), 옥봉정사(김지복), 백화재 양사재(황익재)등이 새로운 건물을 세우며 후학 양성을 해오다.
1580년 황돈 등이 세운 백옥영당을 1714년 새로이 건립하고 조두지소로 춘, 추로 사림 향하며 사서 전식을 배향 하였다.
1715년에 묘우가 현위치로 이건되고 다음해 강담을 건립 함으로 임란 124년만에 후학양성의 서원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며 장수황씨 입향에서 1789년 문루를 이건하며 서원의 면모를 갖추고 사액서원 까지는 374년 후학을 양성하며 사가독서하든 횡당으로부터는 271년 만이다.
천하촌에서 지명을 오도, 일관, 신덕, 동산으로 정하고 방촌황희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후세에 전파하기 시작한 옥동서원은 임진, 계사난에 천하촌과 더불어 완전히 소실 되기까지는 후손에 의해 전승되어 왔으나 백화서당과 옥동서원이 상주 사람에 의해 세워지기까지 6백여년 간의 방촌 황희 정성의 학문과 덕행을 바탕으로 한 후학을 양성키 위해 끊임없이 이어져온 영남 사람과 후손들의 고귀한 문화 유산이며 일인 일서원 원칙의 47개 미훼철 서원으로 청백리 배향의 유일한 서원이다.